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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관광

역사의 얼을 찾아,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사당



청주시블로거기자단을 하면서, 청주에 참 좋은곳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주말은 역사의 얼을 찾아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사당에 찾았어요~

 

들어가는 길에 신채호사당과 고드미마을 안내도가 함께 있네요





 

 

들어가는 길에도 이렇게 태극기가 걸려있어요

역사의 길로 들어가는 길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겠죠?





 

 

이곳이 단재기념관, 신채호 기념관 이에요~





 

 

뭔가 했더니 화장실이구요~ ㅎㅎ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에요. 입장료는 무료고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것 같던데.. 청주에 이런 역사의 흔적이 있으니 많이들 가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슬리퍼로 갈아 신어요





 

 

 

문화관광 해설 안내사가 있어요~

요즘 해설 안내사가 곳곳에 있어서 참 좋은것 같아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대요.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고,

정언을 지낸 조부 성우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어요

18세 때 조부의 소개로 한말 유앟가졍ㅆ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전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소장되어 있는 신, 구 서적을 섭력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어요.

1898년 가을, 신기전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경영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요

당시 서울에서는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요

대중집회 형태의 만민공동회가 연일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열렸고, 러시아의 경제 군사적 간섭에 반대하는 격문이 나붙는가 하면

일본의 월미도 석탄고 기지 철수운동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등이 이를 열렬히 지원했어요.

성균관에서 개화파들과 교분을 다져온 선생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문서부 간부로 활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해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4백여 명이 체포되었을 때

선생 도한 구속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기도 되요.

이후 22세 때인 1901년, 선생은 낙향하여 예관 신규식이 청원군 낭성면 인차리에 설립한 문동학원의 강사로 부임, 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개회자강 사상가로서 자기혁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요.






 

 

20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주필로서 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던 신채호선생

내부를 둘러 볼까요?

 











선생이 애국계몽사상가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 것은 민족역사에 대한 선생의 연구에 있어요.

많은 논설에서 믽족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통하여 민족자강주의를 구현하고

영웅사관을 제시하여 국가의 존망지추에 제2의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고대하는 민족자존의 방도를 강구하였어요.

당시 문화계에서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이 일반적 경향이었어요

또한 일본 사학자들이 근대사학의 미명하에 <조선사>등을 저술하여 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어요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였어요.

그리하여 <독사신론>에서 격렬한 필치로 한편으로는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어요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십세기국민>이란 논설을 연재하여 중고적 영웅의 한계를 지적하고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으느 한, 둘의 영웅에 있지 않고 정치, 종교, 실업, 무역, 학술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국민적 역량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 각계각층의 대내외적 외경력의 발휘를 촉구하였어요

그리고 신국민이야말로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는 역사와 사회의 주체라고 규정하였어요

이와 같은 애국계몽기 단재 사관은 그 뒤 1920년에 완성되는 민주주의 사학에 기초를 마련하여

역사 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어요.

이는 <국사는 곧 국혼> 이라는 박은식의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기도 해요.













1932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임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어요

하지만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어요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어요

1924년에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씌여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시기에 그가 이미 서구의 근대 역사이론과 사회과학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구래의 한국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하여

한국사의 자주적 체계화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선생의 포부와 구상이 잘 드러난 역저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선생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주체성의 문제를 한국사 체계나 사관 정립에 있어 기본 전체로 삼고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 이라고 정의하였어요

아와 비아의 투쟁 사관이라는 격렬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그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일정하게 대응되는 것으로서,

조선사를 서술할 때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설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한국사의 범위와 그 서술방법을 역사론적으로 밝혀놓고 있는 것이에요

 

선생은 이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어요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 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 하였어요







 

 

 

기념관 한바퀴를 돌고 나오면 신채호 선생의 글들을 볼 수 있어요




 

 

자, 이제 사당으로 향해봐요~




 

 

 

단재 신채호사당은 1993년 11월 5일 충청북도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어있어요

이 사당은 1978년에 건립되었고,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 혹은 단재영각으로 불리고 있어요

 

입구의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으로 '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요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나란히 놓인 3개의 석조계단 위에 '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마루가 깔린 통칸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어요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즈막한 담장이 둘러져있어요.







 

 

 

사진에는 빠졌는데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어요

 

 

마지막으로 신채호 동상을 보고 돌아서네요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

그의 업적을 다시금 되새기고 역사의 얼을 찾는 계기가 되었어요~

 

 

 

바로 근처에 고드미녹색마을이 있는것 같아서 찾아가봤어요






 

흑염소들이 너무 자유롭게 뛰어다니네요~

차가 와도.. 천천히.. 피하고 ㅎㅎㅎ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많을 곳으로 기대하고 왔는데

인기척도 없고.. 불러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걸로 봐서

현재는 운영중이 아닌듯 했어요

그래도 간김에 사진 몇장 찍어왔답니다~










여기도 홈스테이같은거 하는것 같은데~

나중에 정보좀 찾아보고 다시 와볼까 해요~

 

 

청주

역사의 얼을 찾아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사당

 

한번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