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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관광

고려를 지킨 대장군, 이 곳에서 잠들다 - 강감찬 장군의 묘, 충현사 -

바야흐로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우리 한민족을 분단시킨 계기가 되었던 6.25, 그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스러져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고자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했다는데요,

하지만!! 내 한 몸 바쳐 싸우는 호국행위라가 근대역사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죠?

저 멀리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선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죠~

슈퍼맨

 

그런데요 여러분~

혹시 '소배압'이란 이름 들어보셨나요?

과거 두차례에 걸쳐 우리 고려에 쳐들어왔던 악명높은 거란족 장수입니다.

말 그대로 '악질' 오랑캐 장수인데요~ 소배압의 군대를 '귀주'에서 단번에 평정하고!!

도망치는 소배압을 "압록강까지 쫓아가" 망신을 톡톡히 준 고려의 장군이 있습니다.  

(힌트 너무 많이 드렸다!!) 

이제 아셨나요?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 한민족의 역사 속

3대 장군 중 한 분인 고려 '강감찬' 장군!!

오늘은 강감찬 장군께서 잠들어계시는 <충현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감찬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고도 험했는데요,

운전을 못하는 으뜸이(ㅠㅠ)!! 시내버스를 타고 옥산으로 가서 또 한참을 걸은 후에야!!

충현사로 가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현충?? 여기가 아닌가보네?? 이러시면 안됩니다~)



 

충현사가 자리잡은 옥산면 국사리 마을은 너무도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는데요~ 양 옆으로 모내기한 벼가 뜨거운 햇볓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가 하면, 



 

헉~ 마을의 중심에는 이렇게 굵은 아름드리 나무 한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짚으로 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이 빙 둘러져 있는 모습이 그 옛날 서낭당이라도 온 듯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기상과 절개가 이 나무에게 전달된 것은 아닐까....싶네요)



 

마을 골목의 언덕을 따라 쭉~ 올라가다보면 충현사가 머지 않았음을 알리는

홍살문이 나오는데요, 요 홍살문은 홍문, 홍전문이라고도 부르며 궁전이나 관아, 능, 묘, 궁전 등

주요 기관이나 관가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색의 나무문입니다. 

사진에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짙은 주황색을 띠고 있어요~  


 

 

홍살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는 길 옆으로 옥수수들이 푸르고 싱싱한 자태를 뽐내며

여름 햇살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짜잔!! 드디어 충현사 앞에 도달했어요~

신나2

장군님이 잠들어계신 곳이어서 그런지 대문의 포스마저 심상치 않은데요,

마치 소림사 대문앞에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쉽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충현사의 내부까지는 들어가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는 법!! 대문 틈으로 손을 넣어 마당과 본당의 사진을 찍었지요~

회색의 기와, 초록과 노란색의 기둥과 서까래, 푸른색의 문살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대문의 오른쪽엔 커다란 비석을 업은 거북이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바로 강감찬 장군의 사적비입니다.(대문의 왼쪽에는 강감찬 장군의 직속 부하 장군이자

소울 메이트로 유명한 '강민첨' 장군의 사적비가 함께 있어요~두 장군님의 넋이 나란히 계신답니다) 

왠지 거북이가 고통을 호소하는 듯 보이는건 기분 탓이겠죠?

(아니면 너무 아래쪽에서 앵글을 잡을 탓일거야.....그럴거야....)

으쌰

 

사적비 뒤편으로 커다란 묘가 있는데요, 바로 이 곳이 강감찬 장군님이 잠들어계신 곳이랍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 역사 속 3대 장군이 을지문덕, 이순신, 강감찬 장군이란 말씀은 앞서 드렸고요,

우리 역사 속 3대 전투로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 귀주대첩을 꼽을 만큼

강감찬 장군께서는 고려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공헌도가 엄청난 분임에도 불구하고!!

왜 장군님의 묘가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왜 정식으로 문을 열고 관람객을 받지 않고 있는지.....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사실 이 곳은 강감찬 장군의 묘이긴 하지만 강감찬 장군의 묘가 아닐 수도 있다는데요...

(읭? 무슨 소리?)



 

강감찬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서울대가 위치한 것으로 유명한 서울의 낙성대!!

고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며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 장군은

개경(지금의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르는데요,

1018년, 71세의 연세에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귀주대첩 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으며(나성) 고려 국방에 적극 힘쓰셨다고 합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신 장군은

지금의 청주 옥산 부근인 동림산에서 은거하며 말년을 보내고, 84세의 연세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덕종은 장군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르며

3일간 조회를 멈추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청주 부근에서 말년을 보내셨다는 기록이 바로 이 곳에 묘가 있다는 증거 중 하나랍니다.) 

 

온 백성이 사랑했던 명장, 그런데 그 명장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니?

대체 어찌된 연유일까요?



 

무덤 앞을 지키는 귀여운 모양의 석상들이에요~ (하나는 염소, 둘은 신하를 표현한 것 같죠?)


때는 바야흐로 조선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9년만에 귀국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아버지 인조로부터 단단히 미움을 샀던 소현세자, 그리고 그런 남편을

굳건하게 지지하다 시아버지 인조에게 더 큰 미움을 샀던 '민회빈 강씨'가 그 비극의 주인공들!!

미운털 잔뜩 박힌 며느리 '민회빈 강씨'가 바로!!(드라마 '꽃들의 전쟁' 송선미 분) 

강감찬 장군의 17대 손이자 당시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이었던 거죠~ 

슬퍼2

분노로 일그러진 임금에게 며느리의 가문이 눈엣가시로 보이는건 당연한 수순!!

이로 인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웠던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은

산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성을 바꾸는 등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상의 묘를 돌볼 여력이 없는 건 당연한 일!!

한 임금의 잘못된 판단과 과욕으로 고려를 지킨 명장의 묘는 방치되고 잊혀진 채

그렇게 다시 330여년이 흘렀는데요~~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 장군의 후손들이 함께 제향을 지내는 모습입니다(2012년 10월)


 

그렇다면 잊혀졌던 강감찬 장군의 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여기엔 웬만한 전설 설화 뺨치는(?) 신기한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이 곳 옥산의 국사리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는데요,

(실제로 1960년대 마을 주민들은 '강감찬 장군'의 묘라고 말씀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전설이 점차 외부에도 알려지면서!!

당시의 문교부, 그러니까 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가 해당 묘소를 직접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이에 김성균 국사편찬위원회장의 지휘로 분묘발굴 및 확인작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묘 근처에는 인상석(人像石/사람 모양의 석상)이 있었는데, 이는 고려에서

정삼품 이상의 고관대작을 지낸 분들의 묘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고요~

또한 강감찬 장군이 은퇴 후 받았던 땅(식읍)의 명칭이 바로 천수남 300호, 천수후 1000호인데요

옥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바로 '천수천(天水川)'이라는 사실까지!!

(점점 더 신빙성이 있어지죠?) 

 

소식을 들은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중!! 

강감찬(姜邯贊/성 강, 현이름 감, 도울 찬)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발견,

1964년이 되던 해 이곳을 강감찬 장군의 묘로 삼고, 1967년엔 사적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1969년 10월에 있었던 강감찬 장군의 신위 봉안식(신위는 '신주를 모셔두는 자리'를 뜻해요~)

광경입니다. 저 작고 외진 마을에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모인 것을 보니,

잃어버린 강감찬 장군의 묘를 찾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지는 듯 합니다. 

누가 봐도 마을 잔치가 벌어진 것 같죠?

 

게다가 이 곳은 오래전부터 마을 이름도 국사리(國仕里/나라 국, 벼슬할 사, 마을 리)였었죠!!

'큰 벼슬을 한 선비가 나온 곳이라는 뜻'!!

강감찬 장군이 '무신'이 아닌 과거에 급제했던 '문신' 출신이란 건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죠?

(어째 점점 더 신빙성이 늘고 있어)  



 

왼쪽이 강감찬 장군의 초상화, 오른쪽이 강민첨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돼지머리에 생닭에 짚을 엮어 만든 제기가 아주 독특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충현사는 지역 문화재 기관으로부터 강감찬 장군의 사당으로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 장군의 후손들이 발견한 묘비석의 글자가 많이 훼손되어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지 정확하지 않은데다,

장군께서 청주에서 말년을 보낸 건 맞지만, 고려 시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분의 묘를 설마 작은 시골에 모셨을리는 없다는....

역사학자들과 문화재 고증담당자분들의 합당한 추측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 모셨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하신다고 하네요~)

이건 뭐 심증은 정확한데 강력한 '물증'이 없기 때문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겠네요. 

 

문화재로의 등록이 어려운 입장이기에

무덤에 풀이 무성해져도 달리 손 쓸 방도가 없고, 관람객들의 발걸음도 뜸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때문에 강감찬 장군, 강민첨 장군의 후손들이 돌아가며 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도 지내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관리할 수 밖에 없다고 하네요~ㅠ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강감찬 장군님의 묘!!

8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셨건만 그 분의 묘를 앞에 두고도

마음껏 추모를 할 수 없는 후손들의 마음은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 속 깊이 살아있는 강감찬 장군님의 기개!!

그것만은 영원한 것이겠죠? 

어서 빨리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어 강감찬 장군님도 후손들도

그리고 이 곳을 찾아오는 이들도 모두가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으뜸이의 바람이에요~

 

 

자료 출처

- 중부일보(15.5.4) <고려를 구한 난세의 영웅 '강감찬'.....귀주대첩 신화를 쓰다>

- 블로그 사이트 이글루: <강감찬 장군 묘소 실전 연유와 되찾은 경위 

  (http://egloos.zum.com/hoika6/v/493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