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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관광

단재의 혼이 서려 있는 고드미 마을을 가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305번지 고드미 녹색마을





무더위를 피해 시외로 드라이브를 가다 태극기 펄럭이는 길을 따라 삼태기 같은 마을로 


들어서게 되었는데요. "고드미" 마을~ 농촌마을의 이름이 아주 예쁘네요. 


그러나 예쁘다는 이름도 잠깐 ~~


고드미 마을의 유래를 알고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지요.


 


"고드미"란 마을 이름은 "대쪽같이 곧다" 는 뜻으로 곧으미.고두미.고디미로 불리다가 


고드미로 불리게 되었다네요.



"고드미"에 대한 유래가 전해지고 있네요.


조선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에게 신요라는 사람이  곧은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갔다가 풀리어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는데 인조반정 후 조정에 여러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않아서 그때부터 이 마을을 곧으미.고디미.고드미 


또 다른말로 귀래동이라 부리게 되었다네요.


 

그 후 이 마을에는  곧은 정신이 깃든 마을이라 그런지 250여년이 지난 뒤에 바른 기개를


 가진 단재선생님이 이곳에서 성장하게 되었지요. 






  고드미 마을 입구로 들어서기 전에 좌측으로 보니 단재기념관과 사당과 묘소가 있네요.


    기념관을 가기전에 단재선생님께 예의를 표하기 위해 사당으로 가서 


묵념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솟을 삼문에는 바른기가 흐르는 문이라는 "정기문"이란 글이 


저의 바른마음 가짐을 갖게 합니다.





 사당 뒤로 돌아가니 문인석 과 망주석,모과나무가 보이는 묘소가 있네요.


저기 보이는 모과나무는 단재선생님이 9세때 중국의 사마광이 고대부터 당나라 말까지 


편년체로 1362년간 기술한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해독하여 할아버지가 책거리 기념으로 심은


 모과나무가 1백 2십여년을 지켜오고 있답니다.






묘소를 내려와 단재선생 부부의 동상에 섰습니다.


단재선생님은 16세때 풍양조씨와 결혼하여 10여년만에 첫 아들 관일이를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고 첫부인과 이혼하게 되었고 국권회복을 위해 해외로 


망명길에 오른 뒤, 1920년 중국에서 박자혜여사를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하였다. 



 박자혜여사는  숙명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간우회 사건을 주동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연변대학 의예과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고 주장을 맡을 만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데요.



독립운동가 이회영씨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단재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답니다. 박자혜여사도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지요.



단재선생님과의 사이에 수범,두범이 두 아들이 있었으나 두범이는 영양실조로


 일찍 잃었답니다.





단재사당과 묘소에 참배를 했으니 이제 기념관을 둘러 봅니다.





기념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좌측에 제일먼저 "조선혁명선언"이 눈에들어 오네요.


단재가 일제하의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1923년 


발표한 행동강령을 담은 6천 4백여자의 선언문으로 일제와  싸우는 혁명이론으로 


단원들은 필독서로 가슴에 항시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앞부분을 읽어보니 일제에 대한 격한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1880년 12월8일 충남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아버지 신광식씨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친을 여윈후 8세때 고드미 마을로 이사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단재의 호는 조선 정몽주의 일편단심가를 흠모하여 "일편단생" "단생" "단재"라 썼구요,





단재선생은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심어주기위해 역사논문.영웅전인 독사신론.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조선상고사등 등 수 많은 책을 저술했지요.




여순감옥의 수형번호 411번호와 단재선생님의 감옥생활 사진을 보니 마음이 뭉쿨해졌습니다.


오직 나라를 찾기위한 독립운동.민족사.언론인등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신 선생님께


당신의 정신을 이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망각을 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오니 단재동상에서 묵념을 하는 대학생들이 보였습니다.


고드미 마을에 농촌봉사활동을 나온 대학교 학생들인데 단재선생님을 찾아준 젊은 학생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디 단재선생님은 바른 정신을 이어가는 훌륭한 나라일꾼으로 성장해 주길 바랬답니다.


 


언젠가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본 글이 기억났습니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부디~~ 분단된 조국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단재선생님의 발자취를 뒤로하고 고드미 녹색체험 마을로 향했습니다.


         단재선생님의 발자취를 보면서 무거웠던 마음이 고드미 체험마을의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논밭을 지나 펼쳐진 예뿐 한옥마을. 


연꽃, 가시연꽃 연못, 산야들이 이내 무거웠던 마음을 치료해 주는 


힐링의 길로~~~ 마음이활짝 펴졌습니다.





체험마을에 도착하니의 장독대. 흙집이 정겨움으로 다가옵니다.





단재선생님이 1916년에 역사 환상소설 "꿈하늘" 이름을 딴 체험마을 방입니다.


여기서 토론하고 잠자면 단재선생님의 함께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드미체험 마을에 오면 긴 댕기머리 날리며 꿈을 멀리 ~~멀리 뛰우는 그네도 탈수 있네요.

 

단재선생님의 정기가 서린 고드미 마을에서 단재선생님의 나라사랑하는 마음도 담고


청정녹색 고드미 마을에서 색다른 농촌 체험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