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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관광

돌다리, 비석, 불상, 봉수대까지....청주의 '보물돌'을 소개해요~


예전부터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 프로그램 '진품명품' 아시죠?

시청하면서 "그렇다면 우리집엔....?" 이런 생각하신 분들 많을 거에요.




다락방이나 장농에 쳐박혀있던 한문으로 쓰여진 낡은 책이 왕의 밀담록이라면?

20년 넘게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 도자기는 혹시 고....고려청자??

주변의 낡은 물건들이 알고보니 엄청난 보물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으흐흐

즐거워


하지만!! 세상 모든 보물들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특급 대우를 받았느냐?

노노~ 그렇진 않았겠죠.

볼품없는 바윗덩어리는 글귀를 새기고 세월의 손때를 입고 나니 비로소 훌륭한 비석이 되었고,  

굴러다니는 돌덩이는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보니

왜적이 침략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봉수대로 거듭난 것이었을 테죠~

 

널부러져 있는 돌들마저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지 그 누가 알았을까요?

청주의 유명한 돌덩이를 찾아다니던 으뜸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는 청주의 보물돌(?)들 한데 모아봤어요!


 

유형문화재 222호 청주 문산리 돌다리

 

오호~ 이건 뭔가요? 반듯반듯 정교하게 맞춰진 커다란 바위~!!

유형문화재 222호에 빛나는 청주 문산리 돌다리에요. 다리 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돌다리가 놓인 시기를 대략 고려시대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을묘년을 보낸 고려의 왕이라면 고종? 혹은 명종? 흐음~ 정확친 않다고 해요.) 

 

원래 문의초등학교 정문쪽에 있던 이 돌다리는 1980년 대청댐 건립으로 인해 

문의면 미천리로 옮겨졌고, 2002년 3월 지금 있는 문의문화재단지로 다시 옮겨왔다고 합니다.

8개의 화강석과 2개의 청석이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죠?



 

유형문화재 222호 청주 문산리 돌다리

 

옆에서 보니 아주 각이 딱딱 들어맞는것이 종이 한장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아요~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곁눈질을 하고, 마추픽추도 견제를 할 것만 같은

아주 과학적인 모양새죠? (흐응~) 

 

 

 

유형문화재 제 150호 순치명 석조여래입상


두번째로 소개해드릴 보물돌은 바로....

유형문화재 제 150호에 빛나는 순치명 석조여래입상이에요!


비밀을 품은 듯 신비하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듯한 미소가 매력적인 불상이지요.

건립시기가 다소 모호했던 위의 돌다리와는 다르게 이 불상의 아래쪽에는 순치구년십일월일십육일입(順治九年一月一十六日入)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선 효종 3년(1652)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답니다.


두툼하고 넉살 좋아보이는 눈매에 뭉툭한 코, 초승달을 뒤집어 놓은 듯한 입술에

어깨와 붙어버린 듯 거북이같은 목선까지, 훈남의 조건을 고루 갖춘 석조여래입상!!


하지만 그의 매력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불상의 높이만도 무려 316cm!! (헉, 여자들이 좋아한다는....키 큰 남자?)


그야말로 '쩌는' 비율을 자랑하는 이 불상은 그 높이 덕분인지, 아니면 관대하고 푸근해보이는 그 미소 덕분인지, 예전부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유형문화재 제 150호 순치명 석조여래입상

 

내가 마을을 360년간 마을을 지켜준 것을 알겠느냐? 아가들아~ (녜이~~)

부처


새파란 하늘 아래 땅을 굽어보는 모습....마치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비슷하지 않나요?

모아이 석상이 한국에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네요.

그만큼 신비롭고도 불가사의한 매력이 넘치는 거겠죠.

 

 

 

문화재자료 제26호 것대산 봉수대

 

자, 그럼 이제 세번째 보물돌을 볼까요?

엥? 산 중턱에 왠 이글루람? 으응? 음식하는 화덕인가?

피자를 구워도 될 것만 같고, 고구마 감자를 던져넣으면 제대로 익어서 나올 것만 같은

이 비주얼의 정체는 바로~!! 문화재자료 제 26호 '것대산 봉수대'!!  


그렇다면 봉수대가 무엇이냐?

봉수(熢燧)란 횃불인 봉(熢)과 연기인 수(燧)로 소식을 알리던 통신제도로서 외적이 마을을 침입할 경우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피워 위급 상황을 알리던 일종의 보안 군사정보 시설이에요.

 

사진을 보면 총 다섯 거(炬)의 봉수대가 총총히 나열해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봉수대를 다섯 거씩 설치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답니다.

  

평상시에는 1거, 적이 국경 부근에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5거에 불을 피움으로써 긴박한 상황을 알렸어요.


지금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느리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빠름~빠름~빠름~ 초고속 군사통신시스템이었다는 사실!!




 

출처: http://blog.naver.com/bandstar8, 블로거 '박은수'님

 

청주의 것대산 봉수대는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위치해 있어요.


것대산(속칭) 서쪽 해발 403m에 있어서 전망도 좋고, 날씨가 좋은 날은 주변의 다른 봉수대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다고 합니다. 가장 가까운 봉수로는 문의 소의산 봉수대(거리14km),

진천 소을산 봉수대(거리 23km)가 있답니다.

 

 

그렇다면 대망의 마지막 보물돌 소개해드릴게요~

그냥 알려드리면 재미없으니까, 스무고개 식으로 힌트 드릴까요? 

 

신미양요,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성공적.....    

감 잡으셨나요?

느낌표


 

기념물 제 23호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바로 구한말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전국적으로 140여개나 세웠다는 '척화비'가 정답이에요~ 

기념물 제 23호로, 청주 중앙공원 한켠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We are the world~"를 외치며 무역 장벽을 허물고 교류를 하는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척화비가 도대체 왜 기념물이어야 하는가? 하는 분들도 계실거에요~

 

하지만 척화비가 세워진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어지럽기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구한말!!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양에 대한 반발감이 극에 달한 흥선대원군은

그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이 척화비를 세웠어요. 


그 후 조선왕조의 위엄을 바로세운다는 명목에만 사로잡혀, 백성들의 눈물도 아랑곳 않은 채 

겉으로는 쇄국정책을 안으로는 경복궁 중건에만 열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189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게 되고, 틈을 타 정권을 잡게 된 개화파 사람들은 전국의 척화비를 철거하거나 땅에 파묻어 버렸다고 합니다.  


척화비의 수난이 청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1976년 2월 29일, 청주 석교동(꽃다리 근처) 길가에서 하수구 뚜껑으로 사용되고 있는 척화비를 시민이 발견, 현재의 중앙공원으로 옮겼다고 해요. 


왠지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짠한 기분이 듭니다.

멍2


 

기념물 제 23호 척화비


전국에 20여개나 있어서 딱히 희소성의 가치도 없고, 비석의 내용 또한 지금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아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비난에 직면한 척화비지만, 우리 역사의 실수(?)를 후대에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교훈을 준다는 의미에서 봤을땐 더 없이 소중한 유물이겠죠?


즐거워



지금까지 청주의 소중한 돌덩이들(?), 청주의 보물돌을 살펴봤는데 어떠신가요? 

그냥 뒀더라면 평범한 돌과 바위로 살아갔을 테지만,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아이디어가 결합되어 더욱 소중해진 우리의 돌!!

 

언제 어디서나 묵직한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서 역사의 한켠을 멋지게 장식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청주의 돌 파이팅!! 우리보물 파이팅!!